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0. 10世 〉2. <요재공>둔세암공휘윤옥행장(遯世菴公諱潤屋行狀)
1. 문헌 목록 〉10. 10世 〉4. <요재공>둔세암공휘윤옥십로회서(遯世菴公諱潤屋十老會序)
1. 문헌 목록 > 10. 10世 >  
3.<요재공>둔세암공휘윤옥묘갈명(遯世菴公諱潤屋墓碣銘)
遯世菴公諱潤屋墓碣銘 昔我莊陵遜位在朝臣僚有謀復位者有毀冠裂冕浩然長徃者有放焉自廢隱遁名姓者盖其同被先王之恩而不敢貳其志也遯世趙公以承旨在政院聞光廟受禪痛哭欲無生投紱退居淳昌之追山下題其室曰遯世興同郡李公元哲安公正金公博韓公承愈薛公山玉薛公存義呉公惟敬申公末舟張公肇平諸同志彷徨乎殘山剩水或登高望天而長喟或含觴賦詩而悲歌其氣節不羣當與生六臣同其調時稱山中十老也申公烈畵其像述其事序之公又吟一絶題其左方曰人言家在大山中不到山中竟不逢非是神仙亦非鬼如何長伴牧猪翁因作簇而各藏于諸家讀之數百載下令人不禁其悲壯嗚咽之思公諱潤屋字某遯世其自號玉川氏冑于麗朝侍中諱璋再傳諱元吉三重大匡玉川君諡忠獻與鄭圃隱偰公長壽策立恭讓王生諱瑛雲觀副正我太宗累徵吏判世子師傅俱不應高王父曰龜山司正曾王父曰士淳郡守王父曰溥持憲父曰希忠訓導母曰淸州韓氏公學襲庭訓蚤捿巍科歷長諫院凛然持古諍臣風公生於端宗丙戌西紀一四六六年卒于中宗癸酉西紀一五一三年墓自淳昌福興坊午陽遷移高敞雅山影堂後山八三番地一九八三年四月枕子原淑夫人南陽洪氏祔左一男繼弘參奉孫男邦寶將仕郎邦珍邦瑞直長曾孫德隣自淳昌移寓高敞之使臣院村后仍蕃衍得士林議祠享十老於所居之陽命曰德川噫公墓中年失傳至後孫聲振東振尋驗得誌乃改封將竪碑表世東賢東燮與鄉儒林君林鍾秀來請以撰竪嗚呼君臣父子天經地義人所不能逃天運雖移吾心不可移時勢雖變吾心不可變斯其義尤當聲明於今日天下者也遂爲銘曰其死其生其義者則一六既無異十何有別大者君親巀鐵彼陽谷石章其揚萬世不泐歲舍強圉作區孟陬 丁酉正月下浣 花山 權純命撰 둔세암공휘윤옥묘갈명(遯世菴公諱潤屋墓碣銘) 예전 우리 莊陵(端宗)이 遜位할 때 조정에 있던 臣僚들이 復位를 圖謀하는 이가 있고 冠冕을 찢어버리고 浩然히 멀리 가버린 이가 있고 自由奔放하게 스스로 모든 것을 廢해 버리고 姓名을 숨긴 이가 있었으니 대개 先王의 은혜를 함께 입어 敢히 그 뜻을 달리 할 수 없어서였다. 遯世 趙公은 承旨로 政院에 있다가 先廟(世祖)가 受禪했음을 듣고 痛哭하여 生을 저버리려 하다가 인끈을 던져 버리고 淳昌 追山 아래 退居하여 그 집에 題顔하기를 遯世라 하고 同郡 李公元哲 安公正 金公博 韓公承愈 薛公存義 呉公惟敬 申公末舟 張公肇平 諸同志와 함께 쇠잔한 江山에 彷徨하며 혹 높은데 올라 하늘을 바라보고 長嘆息하고 혹 술잔을 머금고 詩를 지어 슬피 노래하니 그 氣節의 뛰어남이 마땅히 生六臣과 그 節調를 같이 하여 때에 山中十老라 일컬었다. 申公이 그 화상을 차례로 그리고 그 事蹟을 적어 序를 하고 公이 또한 一 絶을 읊어 그 왼쪽에 적었으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집이 泰山中에 있으니 山中에 들어가지 않고 는 마침내 만나지 못한다 했네. 神仙인가 하면 이것도 아니요 또한 鬼神도 아니니 어찌하여 길이 멧돼지 치는 늙은이를 짝할 것인가?」했다. 그리하여 족자를 만들어 각각 諸家에 간직하게 했으니 數百年 뒤 글을 읽어 보매 사람으로 하여금 悲壯하고 嗚咽하는 感懷를 禁하길 없구나. 公의 諱는 潤屋이요 字는 智요 遯世는 그의 自號이다. 玉川趙氏는 麗祖 侍中 諱 璋에서 비롯하여 再傳해서 諱 元吉은 三重大匡 玉川君으로 諡가 忠獻이니 鄭圃隱 偰長壽와 함께 恭愍王을 策立했고 아드님 諱 瑛은 書雲觀副正으로 太宗이 吏曹判書 世子師傅로 여러 번 불렀으나 다 응하지 않았다. 고조는 龜山이니 司正이고 증조는 士淳이니 郡守이며 조부는 溥이니 司憲府持平이고 아버지는 希忠이니 訓導이며 어머니는 清州韓氏이다. 公이 庭訓을 自襲하여 일찍이 文科에 올라 大司諫을 지냈는데 凛然히 옛 諍臣(임금에게 直諫하는 신하)의 氣風이 있었다. 公이 端宗 丙戌(西紀一四六六年)에 生하여 中宗 癸酉(西紀一五一三年)에 卒했고 墓는 淳昌 福興坊 午陽에서 一九八三年 四月 高敞 雅山面 影堂 뒷산(八三番地 子坐原)으로 옮겼다. 淑夫人 南陽洪氏는 祔左했다. 一男 繼弘은 參奉이고 孫邦寶는 將仕郎 邦珍 邦瑞는 直長이며 曾孫 德隣이 淳昌에서 高敞 使臣院 村後로 移寓하여 因해 자손이 번성했고 士林의 의논에 의해 사는 바 양지 쪽에 十老를 享祠하여 德川이라 命名했다. 슬프다. 公의 墓를 中年에 失傳했다가 後孫 聲振 東振에 이르러 墓誌를 찾아내어 이에 改封하고 碑를 세워 世系를 나타내려 하면서 東賢 東燮이 鄉儒林君 鍾秀와 함께 와서 碑文을 請하는데 嗚呼라. 君臣 父子는 天經 地義라. 사람이 도망갈 수 없는 바 天運이 비록 옮아가도 내 마음을 옮을 수 없는 것이고 時勢가 비록 變해도 내 마음은 變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그 義로움이라 더욱 마땅히 오늘날의 세상에 聲明할 일이로 다. 이에 銘을 하기를, 그 죽음 그 삶이 義인즉 하나이니 六臣이 이미 다름없거든 十志가 무슨 분별 있겠는가? 人倫에서 큰 것은 임금과 어버이라 끊은 듯한 저기 陽谷이요 石碑에 글을 하여 들쳐 내니 萬世토록 泐歲하지 않으리라. 歲丁酉(一九五七) 正月下旬에 花山 權純命 撰
 
1. 문헌 목록 〉10. 10世 〉2. <요재공>둔세암공휘윤옥행장(遯世菴公諱潤屋行狀)
1. 문헌 목록 〉10. 10世 〉4. <요재공>둔세암공휘윤옥십로회서(遯世菴公諱潤屋十老會序)